
2007년 여름, 나가사키 구라바 공원
꽤 좋아하는 한 친구가 있다. 사실 녀석과 나 사이의 '일촌'관계는 무려 '정신적 지주'와 '제자'로 되어있다. 그것은 반정도만 뻥이고 반정도는 진짜인데, 아무튼 의젓한 녀석이 나에게 감명을 준 시간들이 많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지난 겨울, 아니 초봄에 친구는 실연을 했지만 참 이상하게도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힘들어 하기도 했지만, 뭐랄까, 그냥 곧 지나갈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실연의 '힘듬'이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실연'이 지나갈 거라고. 다시 모든게 옛날처럼 돌아올 거라고. 나로서는 그런 모습이 안타까웠기에 얼른 잊어버리라 했지만, 첫 연애에 뭐 그렇게 목숨을 거냐고 했지만 친구는 계속 아니라고, 뭔지 모르겠지만 다시 잘 될것 같은 '자신이 있다'고 했다. 한 사람에게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 되어보고 싶다고 했다. 나에게 자꾸 '진짜 사랑'을 하라고 했다. 친구가 생각한 '진짜 사랑'이 뭐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연애 편력이 그리 대단치는 않지만 그래도 최소한 끝난 연애는 빨리 잊자고 노력하는 것이 개인적인 룰이었기에 몇번 친구를 설득도 해보고 얼러보았으나 역시 남녀상열지사는 옆에서 훈수둔다고 될일이 아닌지라 곧 포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친구는 자신의 마음속을 점점 더 파고 들어갔다.
봄과 여름을 지내며, 친구는 시를 읽기 시작했다. 기계공학과인 주제에 지금은 국문과생인 나보다 시인에 대해서 더 잘 알 정도이다. 실연을 하고나서 읽기 시작한 시가, 자신에겐 구원같으며, 특히 시를 읽으며 커피를 마시는 시간이 좋다고 하는 친구의 말이, 난 솔직히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나 간지러웠다. 무척 미안한 일이지만, 그건 그냥 친구가 만들어낸 허상같은 위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어쨌든 친구는 '괜찮'아 보였다. 그래서 내 마음도 좋았다. 녀석은 헌 책방에서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 88년본을 발견하고 계속 그 얘기만 했다.
약 일주일 전에 친구는 나에게 그녀와 연락을 하고 있으며 조만간 일단 만나볼 거라는 얘기를 했다. 둘 사이의 일은 둘 밖에 모르기에 섣불리 판단할 수도 없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있다'고 말하는 친구가 듬직해보였기에 잘 될것 같다는 막연한 희망을 가졌었다. 무척이나 의젓하게 친구는 왜 자기의 연애가 깨졌는지 인문학적, 철학적, 생물학적 근거에서 생각도 해보고, 사랑하는 사람과는 꼭 사귀어야 하는지도 생각해보고, 외로움을 즐기는 방법은 없는지도 생각해보고, 아무튼 정말 말 없이, 조용히 자신을 다스려왔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다시 만난 친구는 나에게 말했다. 그녀에게 다른 남자가 생겼다고. 그러면서 아무렇지도 않다고 했다. 근데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아니 물론 아무렇지도 않은건 아니었겠지만, 아무튼, 친구는 꽤 괜찮아보였다.
그러자 오히려 내가 괜찮지 않아졌다.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친구가 그동안 한 많은 생각들과 노력들과 심지어 그녀를 더 이해해보자는 마음에 다니기 시작한 성당까지, 그건 무엇이 되는 걸까. 어떻게든 어디서든 그녀가 만난 한 남자라는 존재에 의해 친구가 지난 몇 달간 꿈꿔왔던 미래라는 하나의 가능성은 부서지고 말았다. 나는 늘 연인이 헤어지고 나면 부서지는 세계가 두려웠다. 그건 너무 슬프고 또 무의미한 것들이라고 생각했다. 난 친구가 너무 안됐다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내가 뭐랬어, 그러지 말랬잖아. 에라이 그 사람도 참, 나쁜 사람. 그렇게 욕이라도 한 마디 하길 바랬다.
하지만 그저, 요즘 술을 좀 많이 먹었다고 속이 쓰리다고 말하는 친구는, 무척 많이 자란것 같았다. 어느새 친구는 그 사람을 완전히 위하고 생각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 법을 익힌 것 같았다. 그러자 점차 내가 부끄러워졌다. 친구보다 겨우 몇 번의 연애를 더 해봤다고 그간 이래저래 훈수뒀더것이 창피했다. 입으로는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은 연애의 고수처럼 굴지만, 사실은 아직도 다른 사람에 의지해 알량하게 외로움을 피해보려고 하는 나약함을 만성처럼 가지고 있는 나는 친구 말대로 '진짜 사랑'을 할 자격이 아직 없었는 지도 모른다.
물론 이 말 하나로 나의 지나간 사랑들을 '가짜 사랑'으로 매도할 생각은 없지만, 내 상처만 보듬으려는 이기적인 마음인지, 혼자 견뎌야 하는 것이 싫었던 여린 마음인지, 나는 그 동안의 연애에서 철부지같은 자신을 감싸느라 너무 더디게 자랐고 더디게 배웠다. 그래서 나는 무심코 연애란 그저 끝나고나면 소모적인 것인줄만 알았는지도 모른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자기만 지키느라 바쁜 세상이다. 연애에서 바보가 되지 않으려면 처음엔 최대한 마음을 숨겨야하고, 가능한 그 쪽에서 먼저 다가오도록 유도해야 하며, 헤어질 땐 최대한 빨리 발을 빼야한다.
사람은 어짜피 혼자라지만, 그래서 우리가 사랑하는 그 순간조차도 자기 자신을 버리지 못한다면 핸드폰에 밀려드는 연락과 주위를 둘러싼 친구들이 있어도 그 안에서 우리는 더욱 더 외로이 남게 되는 것은 아닐까. 아, 이 언어의 진부함이란.
무척 아득하지만, 나도 몇 번 나를 버리고 사랑에 매달려봤었던 것 같다. 미친척하고 무작정 돌진해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 그 결과는 좋지 못했고 나는 조금 아팠었던 것 같다.
이제는 무심코 무척 마음에 드는 사람과 있으면서도 그 사람의 사소한 단점들이 나중에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나를 발견하고 조금 씁쓸해질 때가 있다. 그것은 상처를 입고 난 사람이 반사적으로 보이는 반응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이제, 더는 연애가 달콤한 장미빛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나는 그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이건 그냥 하나의 단계일지도 몰라라는 생각을 슬쩍 하고 있긴 했지만, 정말로 꼭 그런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결국엔 들고야 말았다. 얼마나 하느냐보다 어떻게 하느냐. 몇 번 아팠지만, 앞으로 더 아프더라도 그것이 언젠가는 다시 나에게 현실이 될 연애라는 것을 더, 의미있게 만들어준다는 걸.
어쨌든 친구가 그 오묘한 밸런스를 시를 읽고 속성으로 배운건지 어떤건지 모르겠지만, 스스로가 요즘 많이 자란다고 말하는 친구에게 위로 대신 '젋은 베르테르의 기쁨'을 선물했다. 친구가 다시 기뻐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뭐, 순전히 내 시각에서 바라봤을 뿐이지만, 나름 성공적인 연애의 굴곡을 거친 친구를 보며, 나도 조금 '감동'했다.
그런데, 그런 한편 친구는 요즘 한 여자분의 구애(?!)를 받고 있는데, 어떻게 하는게 잘 거절하는 건지 고민스럽다고 했다. 사실 나는 싫지 않으면 누군가를 한번 만나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는데 친구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어보인다. 외롭고 힘들 텐데 자기 좋다는 사람을 그렇게 쳐낼 수 있는 친구의 뚝심에 다시 한번 감탄했으며 세상일이란건 이렇게나 참, 무척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슬퍼졌다.
친구나 나나, 전 여자친구나 대쉬녀(..)나, 우리의 사랑의 짝대기들이 전부 제자리를 찾으면 얼마나 좋을까. 옛날에 김동률과 이소은이 불렀던 커플송의 제목이 '기적'이어서 콧방귀를 뀌었던 적이 있는데, 그냥 갖다붙여진 제목은 아니란걸,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더 잘 알게된다. 기적은 흔히 일어나지 않아서 기적이라고 하는 거라는데. 아무도 힘들어하지 않고 행복한 연애와 행복한 사랑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꿈이라도 꿔야겠다.



덧글
Lemon 2008/07/17 01:12 # 답글
사실 그걸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장밋빛하고는 백년쯤 멀어지는 거겠지요. 그저 서로의 외로움을 핥아줄 수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또 그것만으로는 안되는 걸 아니까 그만두고.그나저나 왜 '좋은' 사람은 그리도 안 보이는데 '싫은' 혹은 '안 되는' 사람만은 그리도 잘 보이는 걸까요. 안타깝게스리...
그래도 자격이라 하시면 안되요....사람마다 다른거니까요. 그 알량하지만 어쩔수 없는 나약함을 아직도 버리지못한 한사람으로써. 솔직히 '자격' 쪽이 '준비'보다 조금 나을지도 모른단 생각은 하지만요...
요새 슬람님 글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즐거워요^^
슬라임군 2008/07/17 23:58 #
으헤헤 아우 레몬님 >ㅇ< 아침에 일어나서 비공개로 돌려버릴까(..)를 고민하게 했던 뻘글..(..)에 이렇게 뜨끈한 덧글을 달아주시다니요! 부끄럽습니다. 헤헷. 그러게말이에요. 정말 참 세상일이란게 마음대로 안되는 것 같아요. 너무 쉽게 풀리면 재미도 없다지만, 그말도 맞긴 하지만 참. 흐흣.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되신다니 영광이네요 ^^ 덕분에 저도 즐겁습니다!!
Ashley 2009/06/25 22:53 # 삭제 답글
"연애에서 바보가 되지 않으려면 처음엔 최대한 마음을 숨겨야하고, 가능한 그 쪽에서 먼저 다가오도록 유도해야 하며, 헤어질 땐 최대한 빨리 발을 빼야한다."글을 정말 잘쓰셔서 맞아~맞아~ 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더랬지요. 굉장히
유쾌하고 즐거웠습니다. 제 과거도 많이 돌아보게 되더라구요. 하지만 전 윗부분이 조금 걸립니다. 물론 사람마다 견해차가 있긴 하지만, 저렇게 연애하면 결국 비겁했던 '나'만 남게 되거든요. 제 경험상.. ㅎ 너무 계산적이라는 생각도 들고..
저걸 못해서 매번 실패했나.. 그런 생각도 들고..
암튼, 친구분 참 대단하세요.^^
뢈 2009/06/26 20:59 #
아,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기쁜 마음입니다 ^///^ 역시 그렇죠. 적어주신 부분이 어떻게 보면 연애를 하는 올바른 "처세"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워낙 쿨하지 못한 뜨뜻미지근한 성격이라 그렇게 잘 하지도 못하고.. () 역시 연애, 사랑이란건 자기를 내던질 정도로!!! 열정적으로 해야하는거긴 한가봐!! 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더군요. 남는게 슬픔이고 배신감이고 허무함이더라도, 자신을 위해서도 그게 더 좋은게 아닐까 하는.그나저나, 이 글을 적은지 오래되서 업데이트를 하지 못했습니다만, 결국 이차저차 한 끝에, 작년 말에 들은 얘기입니디만 그 친구, 다시 그 여자친구랑 만나는 모양이더라구요. 참, 그 얘기 듣고 정말 대단하다 싶었습니다. 정말 진심은 통하는 건가..라는 생각도 들었구요. 아직 잘지내려나 궁금해 집니다만 당연히 잘 지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ㅇ^ 덧글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