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제법 잘어울려요 있었을지도 모를 일

로망과_간지의_베스파.jpg




 거의 대부분의 세상이 잠들어 있는 새벽 네 시, 유리창 너머로 오늘도 카운터에 앉아 살짝 졸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아직 어둑어둑하고, 또 숨을 몰아쉬면 입김이 나올 만큼 춥지만 얼른 집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어쩐지 새벽의 공기를 더 마시고 싶은 것은 이제 곧 봄이 오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그의 하품하는 입이 고양이를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신문배달로 시작되던, 아니 아저씨들과 힘찬 기합과 어슴푸레한 가로등과 쓰레기차와 기타 등등으로 시작되던 나의 하루를, 한순간에 핑크빛의 그것으로 만들어준 새로 생긴 편의점의 야간 알바생.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얼굴에 잠을 참으려 쥐어뜯은 듯 삐죽삐죽 뻗친 머리와 흡사 변태와도 같은 몽롱한 눈빛이 웃기면서도 귀여운 것이, 볼수록 옛날에 예뻐하던 고양이 같다. 일당이 얼마 되지도 않는 신문배달부 주제에 편의점에서 사치를 부리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이지만 요즘엔 어쩐지 말끔한 저 문을 열고 들어가 말을 걸어보고 싶은 생각이 자꾸만 피어오른다. 어떤 목소리를 가졌는지, 몇 살인지, 취미는 뭔지, 혈액형은 뭔지, 가장 감명 깊게 본 영화는 뭔지, 잘 때는 뭘 입고 자는지… 아니 이건 아닌가? 아무튼, 자꾸만 궁금해지는 것이다. 아무래도 목소리는 살짝 중저음에 콧소리가 날 것 같고 끝을 흐리는 표준어 말투를 쓸 것 같은 모양새다. 나이는 대략 20대 중반에 만화책 보는 거나 게임 좋아하는 O형..이 아닐까나, 제대한지 얼마 안 되어서 할 일도 없으니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던가-하면서 오늘도 머릿속으로 온갖 소설을 다 써보고 있다. 진실은 저 너머에 있겠지만- 어쨌든, 실없이 실실 웃으면서 매일 새벽 자기를 관찰하는 눈이 있다는 걸 이 둔한 총각은 알기나 하는 걸까? 

 하지만 오늘도 나의 애마, 낡은 스쿠터를 한참이나 만지작거리다가 그냥 돌아선다. 고단하고 지친 몸을, 무엇보다 지친 마음을 깜빡 졸다가 놀라는 얼굴 한번으로 상큼하게 날려주는 당신.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지만, 귀여워만 보이는 당신의 새벽 또한 나처럼 일로 고되고 피곤하겠지만 그래도 깨어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누군가가 잠을 참으며 같이 이 새벽을 밝히고 있다는 게 그것만으로도 든든한 위로와 따뜻한 말 한마디가 되어준다고 생각하면서. 언젠간 저 문을 열고 들어갈 날이 올까?

 *

 이젠 정말 봄기운이 물씬 피어오르는 상쾌한 새벽, 졸다 깨다를 반복하는 알바생군을 보면서 신문배달 일을 마감하는 것이 어느덧 습관이 되어버렸다. 해가 조금씩 빨리 떠오르기 시작하는 것이, 하얗게 뿜어져 나오던 입김이 점점 옅어지는 것이, 일이 끝나고 온 몸에 느껴지는 노곤함만큼이나 기분 좋다.

 언제나처럼 스쿠터에 기대서서 잠을 깨려는 듯 일어나 마대자루를 들고 기운 없이 걸레질을 하는 알바생군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이쪽을 본 그와 나도 모르는 새 눈이 마주쳤다. 약 2주간 한 번도 없었던 일이라 깜짝 놀라서 힉-하고 얼었는데 저쪽에서 먼저 축 쳐진 눈이 장난꾸러기처럼 씩 웃는다. 그 바보 같은 얼굴에 놀람도 잠시, 마치 오래된 친구를 보는 것처럼 긴장이 풀려버려 나도 같이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바보 2인조처럼 헤벌레 마주보고 웃은 게 얼마나 지났는지, 이번엔 그가 머리를 긁적이던 손을 편의점의 이름이 새겨진 앞치마 주머니에 넣고 쫄래쫄래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한다. 멍하니 ‘와 알바군이 움직인다-’하고 그 광경을 감상하다가, 갑자기 ‘근데.. 당신 스토커지?’라면서 화를 내는 건 아닐까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마른 침을 삼키며 내 스쿠터 좌석을 꼭 붙들었다. 그리고 그때, 편의점의 투명한 유리문이 천천히 열렸다. 오오, 알바군 생각보다 키가 더 크네- 꼴깍.

 “아침마다 수고하시네예. 고생이 많습니더.”

 그리고, 얼어있는 나를 향해 그의 입에서 빼꼼히 삐져나온 귀여운 사투리. 전혀 생각도 못했던 부분이라 영문도 모르고 눈만 껌뻑거리는 그를 앞에다 세워두고 한참을 웃어버렸다. 뭐야 이거, 진짜 재밌잖아. 

 *

 서투르게 탄 커피 한 잔과 함께 매일 부릉부릉 다니던 거리를, 매일 밖에서 들여다보던 이 안에서 바라보는 기분은 정말이지 묘했다. 어느새 떠오른 해와 밝아진 밖을 내다보며 편의점 총각의 음정불명의 콧노래를 듣고 있자니 자꾸 웃음이 나온다. 거리는 이제 막 일을 시작하러 나가는 사람들의 물결이 시작되려 하지만, 새벽을 밝힌 우리의 일은 막 끝났다. 

 “저기요, 시간 있으면은 아침이나 먹을까예.”

 등 뒤에서 슬쩍 쑥스러운 듯 들려온 목소리가 듣기 좋다. 정말 봄이 오는 걸까? 맑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셨다. 앞으로의 나의 새벽은, 우리의 새벽은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갈까. 봄버를 걸친 그의 뒷모습이 이젠 좀 무거워 보인다고 생각했다가, 유리에 비치는 커다란 점퍼 차림의 내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의외로 꽤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생각하면서 성큼성큼 걸음이 큰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딸랑-하고 편의점에 문에 걸린 종이 기분 좋게 울렸다. 어쩐지, 예감이 좋다.


 - Fin



**

0. 헤헤.;;;;;; 

1. 새삼스럽게 말씀드리자면 이 글은 픽션입니다. ;;

2.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냐면, 언제더라, 2년전인가, 3년전인가;; 어딘가에서 주최한(?) 1000자 소설 공모전에 냈다가 1차에서 바로 낙방;;했던 소설을 컴퓨터 깊숙한 곳에서 오늘 발견했거든요.  제목은 그때도 '우린 제법 잘어울려요'였네요. 잊혀졌던 이 글이 가여워서 한번 올려봅니다. 헤헤. 아우 그냥 풋풋하군요. 쑥스러운데... 너무 쑥스러우면 조만간 내릴지도. ;

3. 사실 얼마전에 컴퓨터 하드디스크가 불안정해지는 바람에 포맷하는 사고를 겪었습니다. 겨우겨우 내용물은 건졌습니다만, 복귀과정에서 동아리 방에 있는 매킨토시를 한번 거쳤는데, 운영체제가 일본어였던지라 그바람에 컴퓨터 안에 있던 폴더명, 파일명이 '한글'인 것은 전부 '____'로 바뀌어버려서,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 덕분에 그동안 써왔던 잡문들이 죄다 섞여버려서 뭐가뭔지.... 가끔 전에 썼던 글같은거 참고하고 싶어도 이것저것 다 열어봐야되는 무지하게 귀찮은 상황입니다. 어흑. 그 과정에서 우연히 이 글을 발굴..;;

4. 그러고보니  ㅎㄶㅈ동맹이나, ㅎㄶㄴ사이트 관계자(!) 여러분들은 다 아실테지만 작년 여름인가요, 고딩때부터 썼던 계정이, 돈 내는걸 까맞게 잊어버리는 바람에 백업도 못했는데 싹다 날아갔습니다. 이제와서, 이자리를 빌어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ㅠ_ㅠ 저 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의 추억인데..... 제대로 관리 못한점 사과드려요. 나중에야 알고 계정 관리자에게 연락해봤는데, 이미 복귀할 수 없다고 하더라구요. ㅠ_ㅠ 사죄드립니다.

개인적으론 그와 함께, 고등학생때 잠시 이런저런 홈페이지들을 굴렸던터라 적어두었던 잡문들이 꽤 될텐데, 그것도 다 날아간게 좀 아쉽습니다.10편정도의 소설도 좀 있었는데.. 당시 개인적으로 열심히 봤던 잡지 PAPER스타일로. 헤헤. 왜, 학교 다닐때 매년 만드는 문예지 보는 기분으로 가끔 보면 재미가 쏠쏠한데 말이죠... (아아, 손발이 오그라든다! 라던가.) 지금처럼 대충이라도 내용이 기억날 때 백업본(?)이라도 적어두는게 나을지도 모르겠군요. 사실 글들은 아마 메모장이나 뭘로라도 저장은 해두었을텐데, 컴퓨터를 몇번 옮기는 과정에서 안에 있던 내용물들을 어떻게든 다 보존하면서 왔는데, 이젠 그 양이 너무 방대해져서 뭐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지경이 되어버렸습니다. ;;; 한국집에 있는 컴퓨터안에 혹시 들어있으려나.

5. 사실 지금까지 딱히 어딘가의 종업원을 보고 반하거나 그런적은 없는데 창작력(?)을 되돌아보면 무척이나 그런 소재가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왤까요?;; 저의 내면 어딘가에 잠재된 점원들을 향한 사랑이 존재하나 봅니다(...)

6. 그런고로 오늘 오후는 이래저래 추억에 잠겼네요. S모 모임의 원고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랄까 하고 있..다고나 할까 으히힘나허민아러ㅣㄴㅁ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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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제갈량민 2009/06/20 07:43 # 답글

    여러모로 즐겁게 읽었습니다 :D 그런데 과거의 그것들은 제겐 언제나 흑역사가 되던걸요... 아아... 인생은 잔인합니다...OTL (손발이 오글오글) 뢈님도 원고 하시나요^^? 함께 하시는 분들 정말 굉장하시고... 또 부럽습니다^^
  • 2009/06/21 22:12 #

    으하하 누구에게나 과거의 창작은 흑역사가 되기 마련이지요.. 저도 지금 오그라든 손으로 열심히 타자를 치고 있..(응?) 원고.. 하겠다고 내뱉어는 놨으니 하지 않을까요 ^////^ 바쁠수록 이오쟁패는 재미있을 뿐이고, 원고에 의욕적이 될 뿐이고...(후략)
  • imc84 2009/06/20 09:56 # 답글

    The Den of the Vespa 를 한역하면 로망과_간지의_베스파.jpg군요. 영어는 정말 어려워요. 어휴.

    죄송합니다 이 주체할 수 없는 뻘플본능... 옛날 PC에 저장했던 자료 보존하기 쉽지 않죠 그냥 잊어버리고 살면 모르는데 복구하는 과정에서 날려먹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고들. (저도 비슷한경험이...) 그나저나 그 학교 다닐 때 만드는 문예지 보는 기분 - 내지 손발이 오그라지는 기분 - 은 소중하죠. 남들이 먼저 찾아내서 턱밑에 들이대기 전에 사삭 숨겨야 하니까...응?
  • 2009/06/21 22:15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놔.... 덕분에 마이 웃었습니다. () 역시 그런가요. 흠; 은근히 컴퓨터와 함께한 역사(?)가 길다보니 정말 이젠 뭐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지경이 되어서.. 좀 아쉽기도 하고 그러네요. 남들이 찾아내기 전에 숨겨야 된다는건 정말 진리의 말씀입니다..;; 비슷한 물건으로는 졸업앨범이ㅇ>-<.;; 내가 못찾아낼바에는 아예 없애버려야겠다는 생각이 조금 드는군요. 후후후..(오싹)
  • 2009/06/24 16:13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09/06/26 20:53 #

    ㅋㅋㅋ 그거야 그렇겠지.. 언제나 피곤한 나를 맞아주는 그녀의 인사 '되제?'
  • Mrchildren 2009/06/25 04:36 # 답글

    이글을 보고 den을 검색하려고 롱맨 영영사전을 켰더니 딱 나오는 단어가 moped : a small two-wheeled vehicle with an engine (=motorcycle)이네. 아마 이게 우리가 말하는 스쿠터의 또 다른 영어단어인듯...
    내가 무슨 말을 하는거지.?? 여긴 어딘가? 난 누군가?
    글 재밌게 봤다. 담백하니 맘에 드는데 왜 낙방? 1000자 소설이란 것도 있구나.
    과연 그 당선작들은 대체 어떤 내용일까. 싶군. 단편영화 첨 접할때 마냥 좀 색다르네.
  • 2009/06/26 20:55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결국 베스타의 스쿠터..라는 뜻이군요. 훗. 그런거였군....() 1000자 소설은 그때 무슨 모바일용 소설 개발이라는 프로젝트성 이벤트였던걸로 생각되는데.. 사실 나중에 알고보니 같이 스터디 하는 분들중에 같은 대회에 응모해서 상 받은 분이 있었어요. 그 분이 썼던거는.. 약간 반전이 재미있는 소설이었음. (뱀잡이가 결연히 커다란 구렁이를 잡으러 간다며 결의를 다지고 가는데 알고보니 그 뱀잡이가 말한건 지하철;이었다는 정신분열증적인 내용?;;) 역시 그런게 먹히나봐요. 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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