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 - ![]() J.D. 샐린저 지음/민음사 |
요즘 듣고있는 문학비평 수업에서 '불안의 수사학'이라는 테마로 작품 비평을 공부하면서 썼던 '호밀밭의 파수꾼'에 관한 비평문. 사실 쓸데없이 길기만 하고, 중언부언 했지만 너무 좋아하는 책이라 꼭 올려보고 싶었다. 간만에 블로그질에 탄력도 받았으니() 슬쩍 올려보는. |
문학 작품에 ‘불안’이 어떻게 형상화 되어있는지에 대해 써보라는 숙제를 받고 나서 가장 처음으로 생각난 작품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다. 이 작품은 1951년에 쓰여졌으며 존 레논의 암살범 마크 채프먼이 탐독한 책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어쨌든 개인적으로는 손에 꼽을 정도로 좋아하고, 자주 읽는 작품이다.
주인공 홀든 콜필드가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떠돌면서 보냈던 며칠이 내용의 전부이지만, 이 소설의 매력과 의미는 주인공 홀든의 성격과 독특한 사고방식, 서술방식에서 나온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겨우 16살에서 17살이 되었을 뿐인 이 주인공은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다소 정신병적인, 강박적인 언행을 보이며 끊임없이 ‘불안’해 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 것이다. 어쩌면 학교생활을 견뎌내는 사회적 적응 과정이나 성적, 부모님의 기대도 전부 내던지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만 같은 홀든이 뭔가를 불안해 한다는 것은 모순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홀든은 끊임없이 불안을 느끼는 인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홀든이 묘사하는 많은 인물들, 예를 들어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만을 중시하며 자신에게 도취되어 있는 스트라드레이터나 샐리 같은 인물들은 홀든처럼 진지한 불안을 느끼지도, 뭔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소설이 단순히 사춘기시절에 찾아 올 수 있는 반항기의 한 양상으로 머무르지 않고 뭔가 더 큰 울림을 전해주는 이유를 홀든의 언행 동기, 즉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승전결식의 구조를 뚜렷하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 이야기의 시작점인 펜시 고등학교 퇴학에 대해 홀든은 시종일관 냉소적인 태도로, 그다지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벌써 여러 번 학교를 옮긴 만큼 퇴학 사실을 부모님에게 알려야 하는 것 정도로 나타난다. 그러나 홀든이 이런 저런 생각을 떠올리며 펜시를 떠나는 것을 실감하는 것에 성공한 후 스펜서 선생의 집으로 달려가는 장면에서, 그는 ‘길을 다 건너자 내 모습이 사라지는 것 같다’고 느낀다. 이처럼 ‘점점 자신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 같다’고 느끼는 모티브는 이 소설의 말미에 한번 더 등장한다. 신뢰했던 앤톨리니 선생에게 심정적인 배신을 당한 후 혼자서 크리스마스 분위기인 5번가를 걸으며 그는 불현듯 ‘도저히 건너편까지 건너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자꾸만 아래로 아래로 꺼져 내려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홀든은, 그 사실을 ‘무서’워하고, ‘땀을 비오듯 흘리’며, ‘길모퉁이에 다다를 때마다 동생 앨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고 믿기 시작’한다. 홀든은 앨리에게 ‘제발 날 사라지게 만들지 말라’고 애원하고는 ‘무사히 길을 건널 때마다 앨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앨리는 홀든이 무척 아꼈지만 병으로 세상을 떠 큰 상실감을 안겨준 그의 동생이다.
홀든이 문득 자신의 존재가 사라질까봐 겁에 질리는 이 장면들의 공통점은, 군중 속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신의 존재를 도드라지게 느꼈을 때가 아닌가 한다. 소설 초반의 장면은 펜시 학생 대부분이 라이벌 학교와의 축구경기를 관람하는 동안 퇴학생의 처지로 혼자서 그와 상관없는 쪽으로 달리던 중 든 생각이었고, 후반부의 장면은 크리스마스에 수백만 명은 될 것 같은 아이들이 엄마들과 함께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을 보며 걷다가 한 생각이기 때문이다. 특히 후반부 장면은 거리가 온통 크리스마스의 분위기에 젖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앤톨리니 선생의 집에서마저 쫓겨나다시피 해, 아무데도 갈 곳이 없는 자신의 처지와 눈 앞의 풍경이 극심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부조리가 너무도 많은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냉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이 적응하지 못하고 떠돌고만 있다는 현실에 괴로움을 느끼는 홀든의 심리는 결국, 학생이라는 사회적 신분을 잃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불안에서 확장되어, 물리적인 존재마저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극심한 강박을 느끼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또 죽은 동생 앨리에게 ‘사라지게 하지 말아달라’고 간청하는 것은, 그렇게 일찍 죽어야 할 이유가 단 하나도 없었던, 정말 사랑스러운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을 떠난 동생의 죽음이 홀든에게 너무나 큰 슬픔이었음과 동시에 존재의 소멸은 그렇게 비논리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처음으로 실감하게 해준 사건으로 각인되어, 홀든 자신의 실존에 대한 공포와 불안으로도 이어지고 있었음을 나타내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홀든은 자주 어딘가 서부로, 먼 곳으로 떠나겠다는 망상을 키우지만 그것이 결국 이루어지지 못하리라는 것을 마음 한 구석에는 알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자신이 앞으로 살아가야 하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욕망임과 동시에, 그럼에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며 절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어쨌든 그가 있어야 할 곳이 이 사회라면 그는 끝없이 적응하지 못하고 떠돌며 사회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찾지 못하거나, 적응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할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전자는 지금과 같은 사회적, 물리적 실존의 불안이 계속 되는 것일 테고, 후자는 사회적 자아를 획득하는 대신, 주체인 ‘홀든’에 진정으로 가까운 지금의 자아가 소멸됨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니 아직 어떤 길도 택하지 못하고 번뇌하는 그가, 자신의 존재가 소멸되는 것 같은 불안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이중적 의미로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결국 적응과 부적응, 어느 쪽을 택한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본질적인 상실감이자 불안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사실 그것은 홀든의 눈으로 보기에는 이미 부조리에 젖은 어른이 되어 있을 우리의 마음 한구석에도 언제나 잠들어 있는 불안이기도 할 것이다.
또 이 소설의 유명한 모티브, ‘센트럴 파크의 조그만 연못에 사는 오리들이 겨울에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라는 호기심에도 그의 실존의 불안은 담겨있다. 그 궁금증을 풀어보고자 택시기사들에게 물어보기도 하지만 답을 얻지 못한 홀든은 소설 막바지에 실제로 직접 센트럴 파크에 가서 연못 주변에 오리들이 있는지 찾아보기도 한다. 물론 오리들은 찾을 수 없고, 그것들이 어디로 갔는지 조차 홀든에게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어쨌든 오리들의 행방을 궁금해하는 홀든의 질문에 대해 택시기사들은 터무니 없어 하거나 화를 낸다. 더욱이 호이트라는 한 택시기사는 과도하게 화를 내며 겨울에는 오리보다 물고기가 더 문제일 것이며 그들은 그 곳에서 잘 지내고 있다고 홀든에게 가르친다. 특히 ‘손님이 만약 물고기라면, 대자연이 그쪽을 보살펴주지 않을 것 같소? 겨울이 되기만 하면, 물고기들이 죄다 얼어죽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죠?’라는 말을 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렇다면 홀든은 왜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이런 바보 같은 것을 궁금해하는 것일까? 계절이 바뀐다는 것은 오리들이 어쩔 수 없는, 거대한 자연의 흐름으로 생존환경이 바뀐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 책을 읽고 궁금해서 조사해본 바로는 실제로 대부분의 오리는 겨울에도 지내던 곳에서 지낼 수 있을 정도로 추위에 강하다고 하긴 하지만. 어쨌든 홀든은 의지와 상관없이 제멋대로 변해버리는 환경에 적응해야 할 오리들의 처지를 생각하며, 저항할 수 없는 자연의 흐름과 사회의 변화에 따라 어떻게든 적응하며 살아가야 하는 인간 처지의 불안을 투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를 먹고, 사회적 기대가 달라지고, 소중한 사람들을 잃기도 하는 불가항력적인 변화들. 자신을 둘러싼 환경은 이렇게 자꾸 변화하며 등을 떠미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에 있어야 할 지를 모르는 불안. 대부분의 사람은 ‘어쩔 수 없는, 너무나 당연한’ 변화라고 생각하며 쉽게 갈 길을 받아들이고 적응해가는 것에 비해, 주어진 길, 가야할 길을 쉽게 정하지 못하는 것이 이 소설의 주인공 홀든이며, 그의 그런 고뇌가 오리들에 대한 걱정으로 표현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더욱이 호이트라는 택시기사는 ‘대자연이 물고기들을 먹여줄 것’이라고 말하지만, 소설의 흐름 속에 나타나는 현실의 모습을 생각할 때, 적어도 홀든에게 있어 그것이 인간 사회이든 자연이든, 그런 거대한 흐름은 작은 한 개체에게 전혀 자비롭지 못하다고 인식되고 있으며, 더욱이 그런 무자비한 세상에 곧 자신이 내던져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불안해 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현실에 대해 막연하게 낙관하고 있다는 것 또한 알 수 있으며 그런 점들이 홀든의 치열한 현실인식과, 사회 속 대부분의 사람이 다른 갈등 지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홀든이 어린 여동생 피비에게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장면 또한 이 소설의 제목이 된 만큼, 중요한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것을 지켜보며 그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손을 뻗어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호밀밭의 파수꾼. 고작 16,17세의 어린 나이에 홀든이 학교에서 퇴학당한 직후의 며칠 동안 겪은 일들은 사실 그 나이의 ‘청소년’에게는 무척 벅찼을, 사회의 추잡한 단면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녀들과 같이 긍정적으로 그려지는 존재도 있긴 하지만, 그가 만난 사회 속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어른은 모두 일그러져있다. 더욱이 두 명의 선생님을 만나기도 하지만 처음의 의도는 선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그들 또한 각자의 방법으로 홀든에게 상처를 줄 뿐이다. 부모님은 여러 가지 면에서 홀든이 마음 놓고 기댈 수 없는 존재이고, 그나마 그가 좋아하고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인 형 D.B도 세상과 타협한 끝에 홀든이 저주하는 헐리우드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지할 곳 하나 없이 사회 밖을 떠돌고 있는 홀든은 자신을 절벽 끝으로 몰렸거나, 이미 떨어지고 있는 아이처럼 느낀 것은 아닐까.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는 홀든의 바람은 끝없이 추락하고 있는데도 손을 뻗어 붙잡아주는 파수꾼 하나 만나지 못한 자신의 처지에 대한 인식과 자조이기도 하고, 세상과 어른들에 대한 불신이며, 스스로를 지키며 살아가기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세상살이에 대한 불안을 낭만적으로 형상화 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피비와 같은 사랑스런 어린 아이들이 자라서 잔인한 세상을 만날 때 겪을 일들을 가엾이 여기는 그의 사랑이 나타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홀든이 습관적으로 하는 거짓말들, 제인 갤러허에 대한 생각을 계속 하면서도 끝끝내 연락 하지 못하는 모습, 아늑하다고 느낀 최후의 곳마저 침범해있는 ‘이런, 씹할’이라는 낙서 등등 다양한 요소들이 소설 속에서 존재에 대한 불안과 세상살이에 대한 분노, 불안을 형상화시키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어떤 환경이든, 어떤 존재이든 성장하며 느낄 수 밖에 없는 좌절감과 인간 존재의 불안의 보편성--거대한 흐름에 비해 상대적으로 너무나 미약하게 느껴지는 스스로의 존재, 나이를 먹음과 동시에 부모님의 아늑한 그늘에서 쫓겨나 사회 속으로 내던져지고, 또 언젠가는 소멸된다고 하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10대 특유의 불안한 정서와 인간 군상들의 묘사를 통해 잘 형상화 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홀든은 시종일관 삐딱하고 냉소적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한 연민이나 사랑은 놓지 않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 언급했던 사람들이 보고 싶다’는, 에필로그 격인 마지막 부분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홀든에게는 지금의 이 고통과 불안이 더욱 더 괴롭게 느껴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냉소적인 것이 아니라 그저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것들이 변하고 상실되는 것을 불안해하며, 그러한 것들을 언제까지고 변하지 않도록 지키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을 너무 크게 자랄 때까지 간직하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결국 이러한 나날을 보낸 이후, 홀든이 어떻게 되었는지 이 소설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게다가그것이 타협이든, 끝없는 부적응이든 ‘어른’이 되어있는 홀든의 모습이 도무지 상상되지가 않는 것이다. 50여년 전에 쓰인 소설속의 홀든은 여전히 불안한 17세로 살아있다. 그러나 나는 어쨌든 어른이 되는 것을 멈출 수 없었고, 마음 한 구석에 그의 불안과 좌절을 공유하고, 또 숨기며 이렇게 이십대를 보내고 있다.





덧글
meilin 2009/11/06 09:24 # 답글
저도 최근에 읽었는데.. 감상기 보니 다시 또 읽고 싶네요
뢈 2009/11/22 15:34 #
안녕하세요 meilin님. 너무 늦은 덧덧글이라 밍구하지만 ;ㅅ; 적어봅니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정말 언제 어느대목을 펴서 읽어도 다 좋은것 같아요. 저의 미천한(!) 글을 읽으시고 또 독서 의욕이 샘솟으셨다니 기쁘네요 ^ㅇ^ 쌩뚱맞지만 오늘 무한도전 뉴욕편을 보면서; 또 센트럴 파크 얘기가 나오는걸 보면서; 홀든을 생각하곤 했습니다. 흐흐. 덧글 감사합니다.
son50 2009/11/06 11:19 # 답글
아으~~~~ 다시 읽고 싶어진다ㅠㅠㅠㅠ
뢈 2009/11/22 15:34 #
아으~~~~ 그럴땐 다시 읽는거얏!
imc84 2009/11/22 20:48 # 답글
제가 이 책을 처음 접한 때는 고3 즈음이었죠. 음 학교 독서실에서 공부 안 하고 시간을 죽이면서 읽게 됐는데요. 그 뒤로 몇 번을 더 읽었는지 모르겠네요. 군대가서는 영어공부한답시고 페이퍼백 원서를 사 보기도 했고(이건 딱 한 번 읽었지만;)요. 그 뒤로 의미없이 과장된 숫자를 집어넣는다든지 하는 홀든식 말버릇을 따라하기도 했지요.홀든은 내내 동생들과 가족들과 또는 속물이라 불렀던 머저리들이나 고깝게 본 친구들 위선적인 선생들 이런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를 그리워하고 원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실제로 홀든은 병원에 입원해서 이런저런 것들을 떠올리면서 평온을 되찾은 상태죠. 요컨대 홀든의 불안은 독자에게 실시간으로 다가왔지만 홀든 자신은 갈등의 일정부분을 해소했거나, 적당히 덮어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말이지요. 샐린저 선생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끝내려고 했던 것인지 지금은 더 알기 어렵네요.
읽은지 오래 돼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홀든이 그 때 느낀 불안은 어떤 것이었는지 이제는 더 모르겠어요. 고3 무렵에는 그 불안이 나의 불안과 같은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머리에 피가 얼추 말라가는 시점이 되고보니 또 느낌이 다르더군요. 아무튼 잘 보았어요~
뢈 2009/11/23 02:52 #
아아.. 고3이 읽기엔 너무나 치명적인 책이 아닐까! 그러고보니 전 제가 이책을 언제 처음 읽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나네요. 으음; 언제였을까;;; 홀든식 말버릇은 정말 너무 멋지고 쿨한것 같아요 ㅠ_ㅠ 얘는 왜이렇게 사랑스러운지, 진짜 좀 어릴때;;;는 사랑하는 소설 주인공이라면 무조건 GO의 스기하라를 꼽았지만 얼마전에 다시 읽으면서 홀든의 진지한 삐딱함이 너무나 사랑스럽더라구요. 크헝;그나저나 입원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해본적이 없었는데, 과연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입원이라... 입원. 제가 그 입원에 대해 어떻게 느꼈을까를 지금 새삼스럽게 다시 생각해봤는데, 저는 평온을 되찾았다기 보다 일종의 유예상태인 채로 끝난게 아닐까라는 느낌을 좀 받은것 같기도 합니다. 다른 소설들에서도 그런 모티프가 드러나는 예들이 있지만, 병원은 현실과 좀 격리된 느낌이 있잖아요. 지나가는 곳, 이랄까요. 조금은 도피처 같은 느낌도 있고 말이죠. 샐린저 선생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끝내려고 한걸까요. 대놓고 드러나지 않아 좋아하는 면도 크지만 저도 궁금한 지점입니다. 그치만 그렇게 냉소적이면서도 사람들을 따뜻하게 보는 시선만큼으 느껴지더라구요. 그게 또 이 책이 이렇게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이유가 아닐까 싶기도 하구요. 샐린저 선생 책은 이거말고 다른것도 재미있는게 많다는데.. 좀 손을 뻗어봐야지 싶으면서도 워낙 홀든에 대한 편애가 심해서 잘안됩니다..으허허.
홀든이 느낀 불안은, 지금의 제가 보기엔, 글에다가도 장황하게 썼지만 한 인간 존재로서 실존자체의 불안, 그리고 사회 대한 적응과 부적응 무엇을 택하더라도 자신은 상실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이 아닐까 싶긴 하더랍니다. 개인적으로 요즘 느끼는 것들이라 투영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지만요... 읽어주셔서, 감상 나누어주셔서 감사합니다. :)